오래지 않은 역사
1886년까지 한불관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이전의 양국간 접촉은 실제로 몇몇 선원들과 선교사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인 피에르 모방 (Pierre Maubant)이 한국에 도착한 것이 1836년이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온 초기 프랑스 선교사들은 "은둔의 나라 "한국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된다는 당시 외국인들에 대한 금기에 용감히 맞섰지만 결국 고문당하거나 처형당하는 운명에 처했다(1839년, 1846년과 1866년에 박해가 자행되었다). 1866 년 아홉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대원군의 명에 의해 처형당하자 프랑스 해군은 당시 국제법의 관례에 따라 제한적 보복조치를 취하게 된다. 즉 강화도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 297 책을 압류하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한 것이다. 당대의 관례에 따라 동 의궤는 다수의 복사본이 제작되어 있었다.
1) 외교관계 수립 120년
외교 관계의 시작은 한국과 프랑스 간에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된 1886년 6월 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듬해에는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Victor Collin de Plancy)가 최초의 프랑스 공식 대표의 자격으로 서울에 부임하였다. 그는 이폴리트 프랑댕 (Hyppolite Frandin, 1890-95)이 그 임무를 대신했던 5년을 제외하고 1887년부터1906년까지 15년간 한국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는 공관장을 포함하여 두명이라는 사상 최소의 인원이 근무하였다.
그중 통역관이었던 모리스 쿠랑 (Maurice Courant)은 오늘날 프랑스에서 한국학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적인 시작은 불행히도 한국의 주권 상실과 제2차 세계대전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으로 인해 40년 이상 (1906-49) 단절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한국에는 프랑스 외교사절이 파견되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운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는 상해에서 1919년 4월에 결성된 한국임시정부대표단을 같은 해 1년간 파리에 맞이하기도 했다.
1949년 대사관이 마침내 재개관하고 이듬해인 1950년 3월 부임한 신임 공관장은 그해 7월 포로가 되어 북한으로 끌려가 3년간 (1950년 7월 -1953년 5월) 수용소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심신이 쇠약해져 돌아온 그는 외교관으로서의 생활을 지속하지만 다시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1954년 신임 프랑스 대사가 서울에 부임하면서 이후로는 양국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으나, 이때까지의 한불관계란 실질적으로는 고작 20여년 동안만 실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적 교류는 몇몇 개인적 접촉을 제외하면 사실 한국전쟁 (1950-53)이 그
시발점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수천명의 프랑스인들이 비극적인 상황에 직면한
한국과 한민족의 용기와 진취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3년에 걸쳐 매년 유엔
평화유지군에 소속된 천여명의 프랑스 지원병들이 미군 제2보병사단 제23연대를
이끈 전설적 인물인 프랑스인 몽클라르 (Monclar) 장군 휘하로 파병되었다. 이는
1917년 프랑스에서의 경우를 제외하면 미국 영토 외에서 창설된 미군의 유일한
사단이었다. 대부분 레지스탕스와 프랑스 자유부대 출신이었던 총 3천2백명의
프랑스 지원병들이 전쟁 중 한국에 파병되었고 이들 중 10분의 1 가량인 270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러 개의 기념비가 오늘날 전쟁사의 한 장을 차지한 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프랑스 군대가 주둔했던 수원에 세워진 프랑스 전몰장병추모비와 2007년 비석이 세워진 부산 유엔묘지, 그리고 홍천의 동부지역에서 한국인 부상자를 도우려다 숨진 군의관 장 루이 (Jean-Louis)소령에게 바쳐진 또 하나의 기념비, 서울의 전쟁기념관에 세워진 기념비가 그것이다.
양국간 다수 국민들에 의한 최초의 접촉은 이렇게 한국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 전에는 그렇게 많은 수의 프랑스인들과 한국인들이 만난 사례가 전혀 없었다. 아울러 프랑스에서 전문가들을 제외하면 한국에 대해 그렇게 많이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2002년에 이르러서야 월드컵 축구대회를 기하여 전쟁 당시보다 더 많은 프랑스인들이 한국을 찾았다(6-7천명). 월드컵을 통해서 프랑스인들이 발견하게 된 한국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한국이었을뿐 아니라 축구경기와 즐거움이 어우러진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의 한국이었다.
2006년 한국과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양국수교 120주년 기념행사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개최된 예술, 문화 분야와 과학 및 첨단기술분야의 다양한 행사를 통해 일반 국민들도 상대국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기회였다. 프랑스와 한국 두 나라의 과거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문화적 풍부함과 다양성은 양국 관계의 현재와 미래의 발전을 위해 성공의 조건이 될 것이다.
2)조선의궤에 관한 해결책 찾기
1886 년 외교 관계 수립 후, 특히 한국전에 뒤이은 최초의 한불교류가 실질적으로 발전한 이 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한 한국인 학자가 동 의궤에 관해 수년간 연구하게 된다. 그는 한국에 남아있던 동 의궤들의 복사본이 소실 또는 파기되어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던 일부 의궤들이 유일본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때부터 한국에서 의궤 반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90 년대부터 이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었고 1993년(도서 한 책이 상징적 의미로 반환되었다)과 2000 년 10월에 두 차례에 걸쳐 양국의 대통령은 이 문제를 거론하기에 이르렀고 ‘ 상호교환 ’ 이라는 법적 해결책이 도출되었다. 양국 정상이 확인한 이러한 원칙은 2001년 7월 전문가들 사이에서 합의로 형식화되었다. 2004년 12월 양국정상은 파리에서 또다시 이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합의는 한국 국민의 부정적인 여론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하였다.
양국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2002 년 1 월과 7 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의 전문가 대표단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두 차례 의궤 연구를 마친 한국 전문가들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 유일본 ≫ 의 수가 최초에 발표된 58 책이 아니라 최대 31 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노력에 병행하여 2005년 6월 한국정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30권의 책을 디지털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계획은 2005년 11월 프랑스 및 한국 관련 기관의 동의를 받았다. 고해상도의 디지털화 작업은 현재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으며 한국 국민과 전문가들이 향후 의궤를 널리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2006년 6월 대한민국 총리의 프랑스 방문시 프랑스 총리가 서울에서 의궤 임시 전시회를 열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2006년 10월 프랑스 문공부 장관의 서울 방문 당시 이러한 제안의 실현가능성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방식에 관한 합의점이 도출되지 못했다.
프랑스 정부는 한국에게 이것이 얼마나 민감한 사안인가를 인식하고 있고 2007년 6월 20일 프랑스 총리가 한국 총리에게 확인하였듯이 상호간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지속적인 대화를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