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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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시대의 유산인 "자유, 평등, 박애"의 구호는 프랑스 혁명기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결국 제3공화국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58년 헌법에서 뚜렷이 명시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국가자산의 일부가 되었다.

역사

17세기말경 페늘롱에 의해 만들어진 자유, 평등, 박애의 개념은 계몽주의 시대에 보다 널리 전파되었다.

프랑스 혁명시에는"자유, 평등, 박애 "가 수많은 구호에 등장하였다. 1793년부터는 타 도시 시민들에게 빠르게 영향을 미치는 파리 시민들이 자신들의 집 담벼락에 "공화국의 통합과 불가분성 ; 자유, 평등 아니면 죽음 "같은 단어들을 써넣었다. 그러나 공포정치와의 연관성을 불러일으키는 마지막 부분은 곧 지워야만 했다.

많은 혁명기의 상징들과 마찬가지로 이 구호도 제정시대에 와서는 낡은 것이 되었다. 이후 1848년 혁명시에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재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사제들이 박애의 예수를 찬미하면서 거기에 심어진 자유의 나무를 축복했기 때문이다. 1848년 헌법의 초안이 작성되었을 무렵에는 "자유, 평등, 박애 "의 구호가 공화국의 "원칙 "으로 정립되었다.

제2제정기에 무시당했던 이 구호는 제3공화국에서 결국 정착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공화국 지지자들을 포함한 일부 계층에서는 이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때로는 사회적 계층 분류를 전제로 하는 평등에 비해 연대라는 단어가 더 선호되었고 박애에 나타나 있는 기독교적 암시가 지지를 얻지 못하기도 했다.

1880년 7월 14일 기념식에서 이 구호는 공공건물 정면의 박공에 기록되었다. 1946년과 1958년 헌법에도 명시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국가자산의 완전한 일부가 되었다. 동전이나 우표 등 일반대중을 위한 물건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publie le 21/0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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